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3대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기타 == 사실 [[김종필]] 후보의 경우 당 이름 [[신민주공화당]]에서 볼 수 있듯이 말 그대로 [[민주공화당]]의 계승을 표방하고 있었기에 비슷한 성향[* 물론 실질적으로 두 당간의 사이는 안 좋았다.]의 노태우와 김종필의 표를 합치면 44.70%의 표 비율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양김 후보의 55.07%에 비해 훨씬 적은 것이다. 그럼에도 양김이 졌다는 건 당시 군부와 보수세력이 김종필 대신 노태우로 사실상 단일화해 표를 몰아준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찌됐든 [[12대 총선]]에 비해서도 보-혁 간의 격차가 훨씬 벌어진 건 부정할 수 없었기에 이에 조바심을 느낀 노태우는 1990년 [[3당 합당]]을 시도하고, 이후 남은 민주당계 정당이 이때의 득표율을 넘는 건 2002년 [[16대 대선]]으로 12년이 필요했다. 13대 대선과 뒤이어 치러진 [[13대 총선]]은 유력한 네 후보들이 출신 지역들을 고취하여 심화된 면이 있었지만 "[[대경권|TK]] vs [[부울경|PK]] vs 충청 vs 호남"의 지역구도를 확연히 드러내어 당시 그나마 당시까지 주춤하던 정치적 [[지역감정]]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고[* 물론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 70년대 시작되어 80년대 정점을 찍은 지역감정이 결코 순식간에 사그라들 성격의 것은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은 호남vs비호남 구도를 공고화한다.[* 물론 알다시피 충청은 이후 캐스팅보트화 되었으며 또한 부산과 동부경남 지역도 비슷한 양상으로 가고 있다.] 또한, 양김의 분열로 인해 기존 민주권이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6월 항쟁]]의 주도 세력들이 갈라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를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이후의 일로, 당시 진보(사민주의)권에서 볼 땐 김대중이나 김영삼이나 둘 다 보수야당권 인사 취급을 받았다. 여기서 보수란 북미식 리버럴을 말하는 것으로, 우익과는 구분된다. 실제 90년대에 들어서야 김영삼이 '의회민주주의'을 내세우고, 평민당의 김대중이 '재야 세력'을 끌어안으면서 조금씩 정치적 색깔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한편, 이런 구도는 이른바 '보스 정치'로 알려진 스타 정치인 위주의 정치가 성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5공 세력을 청산하고 민주 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민주화 세력의 열망이 서로 먼저 대통령을 하겠다고 치고박고 싸우던 야권에 의해 스스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민주당계 정당을 지지하던 사람들에게는 좌절감과 충격을 안긴 역대 최악의 선거로 꼽히기도 한다. 특히 김대중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자기가 말한 연설문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했다는 까임도 받았는데[*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저도 권력욕에 휩싸였다는 여러 많은 사람들과 똑같이 되지 말라고 장담할 순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권력이라는 것이 진짜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권력욕에 휩싸인 것이 포인트. 그리고 늦게서야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그때 자신이라도 양보했어야 했다"'''며[* [[https://news.v.daum.net/v/20100729183225795| 단일화, 나라도 양보했어야 하는데.. 너무 후회스럽다" 경향신문]]] 이 단일화 실패를 후회하는 언급을 자서전에서 밝혔다. 양김 입장에서도 명분을 날려먹은 것은 물론이고 득표율도 엄청난 마이너스가 되어버렸다.[* 14대 대선과 15대 대선에서 양김이 얻은 득표를 비교해본다면 김영삼 입장은 3당 합당을 했음에도 구 통일민주당 성향 유권자를 고스란히 끌어안는데 실패한 데다가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의 지지층을 완전히 흡수하는데도 실패하여 호남과 수도권의 개혁적 유권자 표를 날려먹으며 핸디캡이 되었고, 이때 표를 날려먹지 않았으면 보다 야당의원 영입을 하지 않더라도 과반을 넉넉하게 확보하는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갖췄을 것이다. 한편, 김대중 입장에서도 영남권과 강남에서 엄청난 비토를 확산시켰고 동시에 수도권, 충청권, 강원권의 유권자 상당수를 날려먹는 최악의 판단이었다. 그나마 수도권, 충청권, 강원권은 원래 기반+꼬마민주당과의 합당+DJP연합+동진 전략 등으로 일정부분 회복시켰지만, 1987년 대선 과정에서 날려먹은 영남권과 강남3구의 지지는 DJ 생전은 물론 '''현재까지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당선된 [[노태우]] 후보도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선 당시 나타난 노태우의 낮은 득표율은 [[13대 총선]]에서도 이어져 [[여소야대]]로 역대 두 번째의 여당 최소 의석(125석)을 확보하게 되며[* 국회의원 수가 200명 이상이 된 헌정 이후부터 여당이 최소 의석이 된 사례를 보자면 1등은 [[20대 총선]], 3등은 [[16대 총선]]이다. 다만 16대 총선의 경우에는 여당의 지지세가 낮지는 않았지만 당시 공동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이 따로 후보를 내서 그만큼 의석을 깎아먹은게 컸고 새천년민주당 의석수만 따지면 1등이 되기는 한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호남 지역구 압승으로 부활한 김대중과 만만치 않은 의석을 얻은 김영삼은 김종필과 공조하며 6공을 몰아붙이면서 어느 정도 관계가 회복된다. 이때문에 노태우 정권은 국회 내 의석 구도의 불리함 속에 고생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돌파하고자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대규모 정계개편안을 구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고도 임기 말년엔 낮은 정권 지지율 속에 당 총재직 반납과 탈당이란 수모를 당하게 되고, 이후 [[문민정부]]에선 김영삼에게 통수를 맞아 [[전두환]]과 함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구속된다]]. 이 선거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후보는 단일화에 실패했고, 이때 어그러진 사이는 2009년 YS가 DJ 병문안을 가면서 화해의 메시지를 전할 때까지 쉽게 복원되지 않았다지만 김영삼도 후에 대통령이 되어 임기말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을 초청하여 그를 축하해주고 DJ당선은 잘된일이라며 축하해주는 발언으로 볼때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으로 양김의 싸움은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으로 마무리된것이나 다름없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123100209104005&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31&officeId=00020&pageNo=4&printNo=23753&publishType=00010| YS, DJ당선에 잘된일이라며 축하. 동아일보]]] 97년 대선이 끝나고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날인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대통령은 김대중 대선에 대해 "'''어려움속에서 선거의 명예혁명을 이뤄낸 국민들의 용기와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 [[김대중]]당선자의 대통령당선을 축하하며 [[김대중]]대통령 당선자에 힘을모아 협조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12200020910101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0&officeId=00020&pageNo=1&printNo=23743&publishType=00010|선거 명예혁명을 이룬 국민들 지혜와 경의, 1997.12.20 동아일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712200020910201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12-20&officeId=00020&pageNo=2&printNo=23743&publishType=00010|김대통령 담화 의미 1997.12.20 동아일보]]] 그러나 그 당시엔 서로의 이권을 위해서 처절하게 싸웠는지라, 87년에는 운좋게 김종필이 나와 4자 구도가 되었지만, 선거 결과 3강 1약 구도가 확인된 이상 JP를 제외하면 향후 대선에서도 대선후보가 1여 2야(YS, DJ) 구도일 경우 YS나 DJ가 당선될 가능성은 솔직히 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전망은 결국 1990년 노태우의 3당합당 제의에 YS가 응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만약 1987년 단일화가 되었고 반공 이미지가 강했던 YS가 당선됐다면 군부 세력과 피를 섞지 않고 정권교체가 되어 좀 더 청산에 명분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발판으로 92년 대선에는 DJ가 당선됐을 지도 모른다고 예상하는 추론의 영역이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13대 대선의 야권단일화 실패는 '''[[칠레]] 대선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뭔 소린가 하면 1988년 국민투표 직후에 [[피노체트]]의 힘이 급속히 약화되고 칠레가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 무렵, 칠레 야권이 해외 각국의 선거과정을 연구하던 과정에서 한국의 단일화 실패로 인해 군사정권이 정권 연장을 했던 사례에 주목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단일화에 온 힘을 기울였고, 단일후보를 선출하는데 있어서 마찰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1989년에 치른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단일후보를 내는데 성공을 거두면서, 여권후보를 더블 스코어 가까운 차이로 누르고 정권을 차지했으며 20년간 안정적으로 집권할 수 있었다. 이 선거에는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이 출마했다. 그 인물이 바로 [[홍숙자]] 여사인데 [[전인범]] 장군의 어머니이다. 이 시기라면 [[전인범]]이 [[소령]] 진급심사를 준비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며 [[홍숙자]]는 여성의 신분으로 출마는 했으나 얼마 못 가 중도 사퇴하고 [[김영삼]] 지지 선언을 했다. 각 후보들의 선거운동도 관심거리였는데, 나름 재미있게 선거운동을 하려고 최선을 다한 흔적이 역력했다. 일단 노태우는 어디에선가 초등학교 저학년(1980년 또는 1981년 생 정도로 추측)의 여자 어린이를 섭외하여 그 어린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거 운동을 했다. 김대중은 [[밀양 아리랑]]을 다음과 같이 개사해서 불렀다. >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 평화민주당 김대중이 날 좀 보소. 김종필은 자신의 선거 유세[[만화]]를 그려서 배포했다. 문제는 만화의 내용인데 노태우에게는 독재자 이미지를 여자 어린이로 숨기려고 한다며 비판하고 있고, 김대중에게는 통박을 굴린다며 비판하는 내용이다. 한편 16년 만에 치러진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기 때문에, 후보 등록을 시도했으나 서류 미비 등으로 정식 후보에 오르지 못한 인물도 있었는데, 사업가 출신의 박세일(1946년 5월 10일생,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1학년 수료) 씨는 추천인 수 미달로 후보 등록이 접수되지 못했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676482|KBS 뉴스]] 직선제로 치러진 역대 대통령 선거 중 3위 이하의 후보가 시도단위에서 1위를 차지한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이기도 하다.[* 3위 김대중 후보가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에서, 4위 김종필 후보가 [[충청남도]]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 이전이나 이후의 선거에서는 3위 이하의 후보자가 시/도 단위에서 1위를 하는 경우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제일 근접했던 것이 [[17대 대선]]에서의 충남이었는데, [[이회창]] 후보가 1위 [[이명박]] 후보에게 1.03% 뒤진 2위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 1~4위의 득표결과를 낸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모두 [[한나라당]]으로 이어진다.'''[* 우선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1990년의 [[3당 합당]]으로 인해 [[민주자유당]]-[[신한국당]]이 된 후, 그 신한국당이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평화민주당]]의 후신인(물론 이 시점에서 [[김대중]]을 비롯한 동교동계 대다수는 신당인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나갔다)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며 [[한나라당]]이 탄생하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